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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아버지의 인생시계

“너무나도 그 임을 사랑했기에, 그리움이 변해서 사무친 미움.”     가수 문주란의 ‘동숙의 노래’는 아버지의 18번 곡이다. 엄마를 선산에 묻고 돌아오신 날, 아버지는 금주 선언 30년 만에 다시 술을 드시기 시작했다. 어른들 모시고 살면서 눈치 보느라 감정 표현도 제대로 못 하고 살아온 세월이 미안해서였을까. 아니면 무정하게 먼저 떠나버린 아내가 야속해서였을까. 절규하듯 부르시던 그 노래를 우리는 수도 없이 들어야 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사라지셨다. 고모 집에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선 지 두 시간쯤 지났을까. 아버지를 기다리던 고모의 전화 한 통에,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고모 집은 버스로 15분 거리, 걸어가도 충분히 도착할 시간이었기에 모두가 불안에 휩싸였다. 이곳저곳 수소문하던 중,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버스정류장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계시는 아버지를 지나가던 행인이 경찰에 인계했다는 것이다.   여든 되시던 해, 치매 검사 필기시험에서 만점을 받을 만큼 총명하셨던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갑자기 머릿속이 하얀 백지처럼 되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고 했다. 자신이 더 충격을 받으셨는지, 그날은 식사도 거른 채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셨다. 재검사 결과는 알츠하이머형 치매였다. 진행 속도를 늦추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는 의사의 소견에 시곗바늘이라도 붙들고 늘어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90세의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했던 65세로 돌아가 계신 듯하다.   이제 아버지의 뒷바라지는 가족들이 한마음으로 보살피고 있다. 멀리 떨어져 사는 나는 늘 구경꾼일 뿐이다. 올케 언니에게 미안한 마음에 전화를 걸면 “아버님은 너무 착한 치매, 예쁜 치매라서 우리 힘들게 하시진 않아요, 고집이 없어지셔서 오히려 더 편한 점도 있어요”라고 말해주니 참 고맙다. 그 따뜻한 말 한마디가 마음의 짐을 조금 덜어 주었다.   친척 어르신들은 말씀하신다. “너거 엄마가 자식들 힘들게 할까 봐 하늘에서 너거 아부지 정신 줄 딱 붙잡고 있는갑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 하자는 언약을 지키지 못한 엄마의 마지막 배려일까.   치매는 식구들까지 잡는다고 할 만큼 무서운 병이다. 그래서일까, 현대인들이 가장 피하고 싶은 질병 1위가 치매라는 조사 결과도 있다. 평생 교직에 몸담았던 아버지는 이제 모범생이 되었다. 휴지가 눈에 띄면 얼른 주워 휴지통에 버리시고 손은 뽀드득 소리가 날 때까지 깨끗하게 씻으신다. 외출 후 갈아입은 옷은 가지런히 접어두고 방 안은 늘 깔끔하게 정리정돈이 되어 있다.   가끔은 수업 시간인데 운동장에서 배회하는 학생들을 교실로 들여보내야 한다며 서둘러 밖으로 나가시려 한다. “학생들은 잘 타일러야지 윽박지르거나 체벌로 다스려선 절대 안 돼.”     아버지의 그 한마디에, 평생 어떤 교육관과 마음가짐으로 학생들을 지도해 오셨는지 단면이 보이는 듯하다.     무병장수는 모든 이의 소망이다. 하지만 현실은, 유병장수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의술과 의약에 의존해서 살아간다. 아버지는 인지능력 저하로 손녀딸을 막내딸로 착각하시고, 자신의 나이조차 가물가물하신다. 외로움과 그리움의 세월을 견뎌온 25년의 기억은 송두리째 사라지고, 이제는 ‘동숙의 노래’를 부르던 이유마저 잊어버리셨다.   한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하셨던 아버지께 효도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예쁜 치매’라는 이름 아래 남은 여생을 자식들에게 기대어 조금이나마 행복하게 지내시길 바랄 뿐이다.   가족 카톡방에 작은언니의 메시지가 올라왔다. “이번 주말에 아버지 모시고 봄나들이 가는 것 잊지 않았지?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맛집에 가서 점심 먹고, 선산에 들러 엄마께 봄 소식도 전하자. 언덕에서 쑥 캐고, 벚꽃나무 그늘에서 쉬다 올 거니까 돗자리는 오빠가 꼭 챙겨 줘.”   따스한 봄볕을 만끽하며 흩날리는 꽃비를 맞을 때, 또 하나의 추억이 조용히 쌓일 것이다.   아버지의 인생 시계여, 쉬엄쉬엄 놀면서 가렴. 김윤희 / 수필가이 아침에 인생시계 아버지 치매 검사 버스정류장 벤치 가족 카톡방

2025-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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